2016년 9월 10일 토요일 


연하천 대피소는 최악이었다. 오후 9시에 소등을 했는데, 밤새도록 사람들이 왔다갔다했다. 간단한 목구조의 2층 침상은 아무래도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자는 걸 알면 살금살금 걸어야 하는 게 맞는데, 아무도 신경을 안쓰는 것 같았다.

몸은 피곤한데 소리때문에 1시간 30분 간격으로 깨니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새벽 3시쯤에는 정말 한마디 하려다 겨우 참았다.

그런데 참길 잘했다. 아침에 옆에서 왔다 갔다 하던 여자애들 얘기를 들으니 새벽에 별을 보고 싶어서 나갔었던 거였다.

대학 2학년쯤 되었을까? 친구들 셋이 모여 하는 지리산 종주는 오랜 추억이 되겠지.

그리고 그 나이에 보는 밤하늘에 가득한 별은 또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그러니 괜히 내가 화를 안내길 잘했다.

뭐든 이렇게 조금만 참고, 조금만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화를 낼 일도 없는데,

현실은 그러기가 참 힘들다. 

그리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해보려면 상대의 진실을 알아야 하는데,

어른이 되고 사회 경험이 많을 수록 진실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견고한 '포커페이스'를 만들려면 그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지만...내가 너무 부정적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조금 더 현명하다면 사람들의 속뜻을 깊게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어리석어서 한치 앞밖에 못보면서 세상을 비난 할 것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다음엔 연하천대피소를 피하고 싶어졌다. 언제 다시 지리산 종주를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잠도 못자고, 화장실도 최악이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건 좋은데, 푸세식에서 일을 보는 건 너무 힘들었다.

사실 문 앞에만 가도 구역질이 나서 대피소의 화장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먹고싶지 않아졌다.

아침에 벽소령 대피소 화장실을 갔는데, 여기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냄새가 안나서 정말 좋았다.

수세식 화장실이 이렇게 감사한 줄 초등학교 1학년 이후로 처음으로 느꼈다.

그러고보기 목욕 안한지 3일째다. 생각보다 견딜만 한데 이제 머리 묶은 건 풀지 못하겠다.

다행히 땀냄새는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것 같다.

아침마다 찬물에 세수하는 것이 기분이 좋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아침을 건조 북어국블럭, 참치캔 하나, 콘 와플 9조각, 천하장사 소시지 3개로 먹고 벽소령으로 향했다.

뜨는 해를 보며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그래서인가 가다가 바위에 잔뜩 피어있는 석이버섯도 발견했다.

말로만 듣던 석이 버섯을 보고 만져보니 신기했다. 보드라웠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석이버섯이 자라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리니까 석이버섯을 찾을 수 없었는지도.


어제 저녁엔 무릎이 너무 아팠는데 아침이 되니 또 괜찮아졌다. 잠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하지만 벽소령 지나서부터는 또 다시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점점 더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제 주운 나무 지팡이도 부러졌다. 그런데 지팡이 없이 걸으니 무릎 통증이 덜해졌다. 맞지 않는 지팡이를 짚어서 그런걸까.

아픈 건 왼쪽 무릎인데 걷기도 너무 힘들고 그러니 짐이 점점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세석대피소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1시 30분 정도에 도착했는데, 멍때리다보니 3시 30분이 되어버렸다. 

대피소 캐노피 아래에는 테이블이 많아서 사람들이 잔뜩 모여 밥을 해먹고 있었다. 나도 뭘 좀 먹기는 해야겠고, 앉고는 싶고.. 해서 구석이 비어있는 듯한 테이블에 가서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아저씨 둘이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길래 합석했다.

그 사람들은 여럿이 팀으로 종주를 왔다는데, 자기 둘만 당일치기 종주를 하기로 했단다. 밤차를 타고 새벽에 노고단에 올라서 세석까지 오다니.. 대단하다. 

난 못할 것 같다. 하긴 하라면 하겠지만, 굳이 해야할 이유는 못느끼겠다.

살 날이 일주일밖에 안남았다면 하루정도 지리산 종주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사람들이 버터를 발라 구운 토스트를 권하는데, 사양안하고 먹었다. 나도 너무 배가 고프기도 하고 빵이 먹고 싶었다.

평소같았으면 절대 사양했을텐데, 몸이 피곤하고 배고프니 사람이 좀 열리는 것 같기도 하다.


세석까지 오는 막바지 길에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났다.

마음이 아프다고 지리산에서 씻지도 못하고, 아픈 무릎으로 바위같은 배낭을 매고 산길에서 이게 뭐하는 건가.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하고 몸도 힘들고 그래서 눈물이 났다.


뭐 어쨌든 이번에 지리산 종주를 하고나면 더이상 지리산 종주한 사람들의 경험이 궁금하지는 않겠지 싶었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뭐든 한번 해보고나면 별거 아닌데, 나는 참 생각도 많고 겁도 많다.


노고단에서 연하천까지 걷는 어제의 길은 뭔가 희망적인 마음에 가득찼었는데, 오늘 세석까지 오는 길은 너무나 비관적인 마음이 가득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괜히 내 사생활이며 고민을 털어놓은 것도 너무 후회가 됐다. 

저급한 호기심에 진실할 필요는 없었는데...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도 되지도 않는 작업을 붙잡고 책상에 앉아 있느니 산에 오는 게 낫긴하다.


산에서는 생각이 단순해진다.

산에서는 다음에 어떤 돌을 밟아야 넘어지지 않을지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전부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끊임없이 명상을 하게된다. 산에서는



5시쯤 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석평전에 고즈넉하게 내리는 비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하지만 몸도 너무 피곤하고 무릎도 아파서 내일 어떻게 해야할지 계속 고민이 되었다.

어차피 내 목표는 천왕봉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고 천왕봉 일출을 보는 것도 아닌데

무리해서까지 천왕봉에 오를 필요가 있을까.

누워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문자가 왔다. 기어서라도 올라가보란다.

그래서 올라가보기로 했다. 그냥 이번에 한번으로 다 올라가버리고 더이상 동경이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아버리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그냥 던진 말을 나는 참 의미있게 해석을 했다.


내일 아침 5시쯤 떠나면 촛대봉에서 6시에 일출을 보고 천왕봉에 오른 다음 집으로 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힘든 산행길 내내 머리에 맴돌던 시가 있다.

여기에 적어놓는다.

-----

무화과 숲


-황 인찬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도사  (0) 2016.12.10
지리산 종주_04  (2) 2016.10.28
지리산 종주_02  (0) 2016.10.14
지리산 종주_01  (0) 2016.10.09
노고단  (0) 2016.09.28

2016년 9월 9일 금요일


예상은 깊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밤에 잠을 거의 설치다시피 제대로 자지 못했다.

6시에 입실시작하자마자 들어가서 짐 정리하고 한 8시부터 자리에 누웠다. 

오전 5시에 일어났으니 시간으로 치면 9시간을 잔건데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오랜만에 꿈을 꿨는데 꿈속의 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꿈에서 다시 똑같은 자리에서 자고 있었다. 

실제로 내 주변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꿈에서는 내 옆 자리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게 이불을 던지고 화를 냈다. 나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영어로 직접 이불을 가져가라고 하다가 잠이 깼다.

왜 갑자기 영어를 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꿈에서 이제 남이 된 사람도 보았다. 그 사람은 어떤 글을 읽고 있었다.

2시에 깨고 4시에 깨고... 계획대로 어쨌든 5시에 깼다. 


5시에 일어난 이유는 아침을 먹고 노고단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그동안은 노고단에 새벽에 올라갈 수 없었는데, 금년에 일시적으로 일출을 볼 수 있게 개방했다기에 한번 보고 싶었다.

해는 매일매일 어디서든 뜨지만, 게다가 아무 의미없이 보내는 해이지만

특별히 마음을 내어 보는 해는 소중하게 느껴진다. 매일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


사람들도 다들 일찍 일어났다. 오늘 일출시간은 오전 6시 9분이다.

비누는 쓸 수 없다길래 순한 클렌저를 솜에 묻혀 얼굴을 닦은 후에 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새벽에 찬물로 세수를 하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선 화장실을 나와서 하늘을 봤는데, 어제 밤에 가득하던 구름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아.. 나도 모르게 한참을 별을 봤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물 묻은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새벽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대피소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아침은 건조블럭 북어국, 참치캔 하나와 콘와플 7개를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햇반도 끓이고 그러던데,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동안 무거운 마음에 밥을 거의 먹지 않았더니 위가 줄었나..? 아무튼 기운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았다.

그런데 쓰레기를 잘 챙긴다면서 정신없이 배낭을 매고 나오다가 어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준 빵과 함께 대피소에 놓고 와버렸다.

빵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지만 안먹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대피소에서 노고단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별을 보며 아무도 없는 노고단 길을 오르는 것은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멀리서 어슴푸레 밝아지는 하늘빛을 보는데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가는 것이 아쉬워 서서는 둘러보고 또 다시 오르고 아무튼 지렁이속도로 올라갔다.

노고단 정상에서 해가 뜨는 걸 보려고 한참 기다렸다. 사실 정확히는 한참인지는 모르겠다.

9월 초이긴 해도 산 위는 정말 추웠다. 소프트쉘 하나 걸치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려니, 손이 시려워서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냥 내려가버릴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오기로 버텼다. 

하늘에 구름이 약간 있어서 사람들이 오늘은 일출보기 힘들겠다고 한마디씩 하는데 해가 구름 위로 머리를 들이밀더니 순식간에 붉게 반짝였다.

손이 아픈 것도 잊고 떠오르는 해를 봤다. 

이래서 사람들이 일출을 보려고 산에도 오르고 넘치는 인파와 함께 바닷가를 찾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해를 매일 아침 보면서 하루를 맞으면 그 사람은 하루를 얼마나 소중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긴 매일 떠도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 요즘의 한심한 내가 그렇듯.

붉은 해도 아름다웠지만,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길이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 가득 했던 순간이어서.


내려오는 길에 물매화를 봤다. 

물매화가 엄청 아름답다고 극찬을 해서 무슨 꽃인가 궁금했는데, 상상과는 다르게 갸냘프고 섬세해 보이는 꽃은 아니었다. 

사실 난 어떤 꽃이 다른 꽃보다 더 아름답다.. 그런 식으로 비교하는 사람은 잘 이해가 안갔는데,

막상 물매화 칭찬을 들었을 때는 반박을 못했다. 하긴 굳이 내 의견을 말한다고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

세상에 아름답지 않고 쓸모 없는 꽃이 있을까?

이유없이 피었다가 지는 꽃은 있을까?

치열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지 않는 꽃은 있을까?


노고단-임걸령까지의 길은 전에도 와봤기에 익숙했다. 

역시나 비밀의 숲길처럼 아늑하고 예뻤다. 특히 이른 아침에 걸으니까 사람도 없고 좋았다.

8월 중순에 왔을 때는 길에 온갖 야생화가 가득해서 화려했는데, 이젠 9월이라고 꽃이 그때처럼 다양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예뻤다.

이번엔 임걸령 샘물도 마셨다. 목이 마르지 않아서인지 아주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번 마셔봤다.


임걸령지나서부터는 배낭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그래서 핑계김에 아주 천천히 걸었다.

배낭이 없었으면 성큼성큼 걸었을 길이 참 길었다. 

그래도 언제 또 올까 싶어서 노루목에서 반야봉을 들렀다 오기로 했다. 

와.. 그런데 노루목에서 반야봉 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멀리에서는 부드럽게만 보이던 능선이 가까이 가서 보니까 돌 투성이였다.

어깨에 짐이 없었으면 괜찮았을텐데, 한걸음 한걸음이 진심으로 천근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갔다. '반야봉'이라고 써있는 돌 옆에 가자마자 바로 털썩 앉아서 오래 쉬었다.

멀리 노고단이 보였다. 

언제 저기까지 가나했는데, 무거워도 한걸음씩 걷다보니 반야봉도 와보는구나.

사는 것도 그냥 이렇게 순탄하기만 하면 좋을텐데...하긴 굳이 따져보면 난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도 예기치 않은 흙구덩이같은 인간관계는 안맺고 싶다.

난 진실하지 않게 사람을 대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진실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서 나는 힘든 적이 많았다.

자신을 숨기는 것이 유연하게 인간관계를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사람을 만나야되는건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건지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필요하지만, 대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인걸까.

그 사회에 적응하면 나는 행복해질까?

그 사회인들이 내게 말하듯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반야봉에서 내려왔다.


연하천 사거리까지 오는 길은 더 길게 느껴졌다.

작업을 오래 서서 하다보면 왼쪽 무릎이 아프곤 하는데, 산에서 무릎이 아픈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별로 쓰지도 않았는데, 너무 아팠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통증이 컸다. 짐은 무겁고.. 어떻게 연하천대피소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3시쯤 도착했는데 6시에 입실이랬다.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니!

천하장사 소세지 세 개를 먹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서 탁자에 엎어져서 졸았다.

춥고 배고프고 졸립고. 다행히 5시에 일찍 입실을 시켜줬다. 


추워서 더운 물을 마시고 싶은데 버너가 없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떤 사람에게 처음으로 더운 물을 얻었다.

노고단에서 연하천까지 오는 길에 몇 번 만난사람같은데 얼굴은 잘 기억이 안났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더운 물 한모금이 목을 타고 배로 흘러들어 가는데 행복했다.

물 한모금이 이렇게도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는 걸 오늘 오랜만에 깨달았다.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종주_04  (2) 2016.10.28
지리산 종주_03  (0) 2016.10.20
지리산 종주_01  (0) 2016.10.09
노고단  (0) 2016.09.28
구례  (0) 2016.09.28

2016년 9월 8일 목요일



수요일 저녁까지 짐을 다 싸놓고도 아침까지 산에 갈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오전 버스를 예매했다.

그래서 약간은 대책없이 3박 4일의 지리산 종주 일정을 시작했다.

어차피 안가도 머리가 복잡해서 일을 할 수가 없으니, 할 일은 밀쳐두고 떠났다.

오랜만에 버스에서 곯아 떨어졌다. 잠을 제대로 잔다고 잤는데 그동안 항상 거의 반은 깨어있는 상태로 밤을 보내서인가 정말 오랜만에 정신을 잃고 잤다.

구례 터미널에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픽업을 와주셨다. 

난 밤에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노고단 대피소에서 잘 예정이지만 할 얘기가 있기도 하고 해서 잠깐 게스트하우스에서 대화를 나눴다.

사실 지금 되돌아와 생각해보면 이때의 나는 마음이 너무 힘들어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 울고 쓸데없는 말도 많이 했고, 무례한 질문도 들었는데 반박을 못했다.

누군가와 마음 속에 쌓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상대에 따라 얘기를 해야하는 걸 실수를 했다.

상대는 단지 흥미만을 가지고 재미를 취하려고 꺼낸 얘기인데, 내 스스로를 광대로 만들어버리는 실수.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는 깊게 생각할 수도 없었고, 

당시에는 마음에 담고 있는 걸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런 마음으로 노고단으로 올라가게 된 것은 나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성삼재에 올라갈 계획이어서 약 30분간을 대화를 나누고 화엄사 앞에서 버스를 탔다.

평일의 막차 전 차라서 그런지 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용히 저녁빛 속에서 산을 올라갔다.

늦은 오후라 성삼재 주차장은 한산했다. 혹시 몰라서 매점에서 트윅스 4개를 샀다. 

짐을 안 가져온다고 줄이고 줄였는데도, 막상 짐을 메고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길고 힘들었다. 생각외로

그래도 처음으로 사람 없이 한적하게 노고단으로 오르니 상쾌하고 좋았다. 

노고단 대피소는 6시에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길래 대피소 옆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좀 보고 있으려니 들어오라고 방송이 나왔다.

대피소에 예약한 사람이 별로 없는지 남,녀가 같은 방에서 잔단다. 그래도 나무로 다 구분을 해놓아서 별 상관은 안됐다.

그리고 혼자 온 나는 알아서 구석자리로 줬다. 모포와 깔개를 하나씩 대여하고 터키갈 때 산 라이너를 오늘 처음으로 개시했다.

자리를 깔아놓고 배낭을 좀 정리한 후에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난 버너를 안가지고 왔다. 어차피 많이 먹지도 않을 거니까 더운 물을 주변 사람에게 부탁하자는 각오로 왔다.

각오.. 별거 아닌 이게 나에겐 각오다.

부탁하는 건 나에겐 너무 힘든 일이니까 핑계김에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연습도 좀 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더운 물을 얻어서 보온병에 가득 담아왔다.

더운 물로 건조블럭 북어국을 데우고, 천하장사 소시지, 트윅스, 콘 와플7조각 정도 먹었다.

별로 배도 안고팠고, 건조 북어국이 꽤 괜찮았다.

산 위라 그런가 노고단의 저녁바람은 꽤 차가웠는데, 국물이 배를 따뜻하게 녹여주는 기분이 좋았다.


야외 벤치에서 간촐한 저녁을 먹으며 원시부족의 성인식을 생각했다.

혼자 숲속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고 그것을 무사히 통과해야 성인으로 인정받는 성인식.

내 이번 지리산 종주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사람은 아주 험난한 고통이 아닌 이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종주를 통해 내 자신과 내 현실을 인식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지니 많이 추웠다. 오후에는 안그랬는데 해가 지면서 구름이 잔뜩 몰려왔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톱만한 달이 구름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검은 밤과 검은 하늘이 시원하고 좋았다.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종주_03  (0) 2016.10.20
지리산 종주_02  (0) 2016.10.14
노고단  (0) 2016.09.28
구례  (0) 2016.09.28
지리산 둘레길  (0) 2016.09.2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