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걸어본 지리산 둘레길의 느낌이 편안하고 좋았다.
조용히 걷는 것이 좋았다. 걸으면 생각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때부터 여기저기 트래킹을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표가 하나 있긴 했다. 지리산 둘레길을 다 돌아보자는 거였다.
천천히.
한번에 다 도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이어서 가보기로 했다.
일단 동강-수철을 걸었으니까 동강부터 시작해서 한 3코스정도 다녔던 것 같다.
그러다 개인적으로 일도 바쁘고 개인사도 복잡해지는 바람에 통 못갔다.
나에게는 인간관계가 아킬레스 건인데, 인간관계가 잘 안풀리면 일이고 뭐고 한없이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다.
2014년 2월인가? 여느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작업실로 출근을 하는 날이었다.
2013년 12월에 인간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할일은 있었으니까, 그리고 작업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므로
그날도 최악으로 우울한 기분으로 천근같은 마음과 몸을 이끌고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작업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르막길에서 난 정말 달린다고 달렸는데, 한 5미터나 달렸나? 뒤에 화물차 아저씨가 빵빵 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서 뒤로 째려봤다. 그런데 이런...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당연히 고울 수 없었던 내 눈빛을 보고 아저씨가 '야!이 씨발년아!' 라고 욕하는데 진짜 너무 화가 났다.
마침 횡단보도가 앞에 있고 신호가 바뀌었길래 나는 그 횡단보도를 지나서 자전거를 세우고
아직 신호에 걸려있는 아저씨에게 수신호로 fuck you를 크게 날려줬다. 그랬더니 아저씨의 욕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욕을 먹었지만, 그래도 나도 수신호로 나마 답욕을 해줬고,
거기에 또 욕을 하는 아저씨가 무서워서 열심히 자전거를 달려서 안전한 작업실로 왔지만
그래서 작업실 의자에 앉았지만, 도저히 작업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씨발년'이라는 욕 한마디가 내게 잊고 있었던 많은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참을 수 없이 힘들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업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짐을 싸서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디로 갈까 하다가 다음날 아침에 용산에서 구례구로 가는 기차표를 끊고 이불을 펴고 잤다.
오래오래 기차를 탈 수 있게 무궁화호로 끊었다.
하지만 그날 지리산 꿈을 꾸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잠을 자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그날 눈을 감고 이불에 조개처럼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