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8일 목요일
수요일 저녁까지 짐을 다 싸놓고도 아침까지 산에 갈까말까 고민을 하다가 오전 버스를 예매했다.
그래서 약간은 대책없이 3박 4일의 지리산 종주 일정을 시작했다.
어차피 안가도 머리가 복잡해서 일을 할 수가 없으니, 할 일은 밀쳐두고 떠났다.
오랜만에 버스에서 곯아 떨어졌다. 잠을 제대로 잔다고 잤는데 그동안 항상 거의 반은 깨어있는 상태로 밤을 보내서인가 정말 오랜만에 정신을 잃고 잤다.
구례 터미널에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픽업을 와주셨다.
난 밤에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노고단 대피소에서 잘 예정이지만 할 얘기가 있기도 하고 해서 잠깐 게스트하우스에서 대화를 나눴다.
사실 지금 되돌아와 생각해보면 이때의 나는 마음이 너무 힘들어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 울고 쓸데없는 말도 많이 했고, 무례한 질문도 들었는데 반박을 못했다.
누군가와 마음 속에 쌓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상대에 따라 얘기를 해야하는 걸 실수를 했다.
상대는 단지 흥미만을 가지고 재미를 취하려고 꺼낸 얘기인데, 내 스스로를 광대로 만들어버리는 실수.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그때는 깊게 생각할 수도 없었고,
당시에는 마음에 담고 있는 걸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런 마음으로 노고단으로 올라가게 된 것은 나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성삼재에 올라갈 계획이어서 약 30분간을 대화를 나누고 화엄사 앞에서 버스를 탔다.
평일의 막차 전 차라서 그런지 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용히 저녁빛 속에서 산을 올라갔다.
늦은 오후라 성삼재 주차장은 한산했다. 혹시 몰라서 매점에서 트윅스 4개를 샀다.
짐을 안 가져온다고 줄이고 줄였는데도, 막상 짐을 메고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가는 길은 길고 힘들었다. 생각외로
그래도 처음으로 사람 없이 한적하게 노고단으로 오르니 상쾌하고 좋았다.
노고단 대피소는 6시에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길래 대피소 옆 벤치에 누워서 하늘을 좀 보고 있으려니 들어오라고 방송이 나왔다.
대피소에 예약한 사람이 별로 없는지 남,녀가 같은 방에서 잔단다. 그래도 나무로 다 구분을 해놓아서 별 상관은 안됐다.
그리고 혼자 온 나는 알아서 구석자리로 줬다. 모포와 깔개를 하나씩 대여하고 터키갈 때 산 라이너를 오늘 처음으로 개시했다.
자리를 깔아놓고 배낭을 좀 정리한 후에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난 버너를 안가지고 왔다. 어차피 많이 먹지도 않을 거니까 더운 물을 주변 사람에게 부탁하자는 각오로 왔다.
각오.. 별거 아닌 이게 나에겐 각오다.
부탁하는 건 나에겐 너무 힘든 일이니까 핑계김에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연습도 좀 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다행히 오늘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더운 물을 얻어서 보온병에 가득 담아왔다.
더운 물로 건조블럭 북어국을 데우고, 천하장사 소시지, 트윅스, 콘 와플7조각 정도 먹었다.
별로 배도 안고팠고, 건조 북어국이 꽤 괜찮았다.
산 위라 그런가 노고단의 저녁바람은 꽤 차가웠는데, 국물이 배를 따뜻하게 녹여주는 기분이 좋았다.
야외 벤치에서 간촐한 저녁을 먹으며 원시부족의 성인식을 생각했다.
혼자 숲속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고 그것을 무사히 통과해야 성인으로 인정받는 성인식.
내 이번 지리산 종주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사람은 아주 험난한 고통이 아닌 이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종주를 통해 내 자신과 내 현실을 인식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지니 많이 추웠다. 오후에는 안그랬는데 해가 지면서 구름이 잔뜩 몰려왔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톱만한 달이 구름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검은 밤과 검은 하늘이 시원하고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