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9일 금요일


예상은 깊게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밤에 잠을 거의 설치다시피 제대로 자지 못했다.

6시에 입실시작하자마자 들어가서 짐 정리하고 한 8시부터 자리에 누웠다. 

오전 5시에 일어났으니 시간으로 치면 9시간을 잔건데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오랜만에 꿈을 꿨는데 꿈속의 꿈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꿈에서 다시 똑같은 자리에서 자고 있었다. 

실제로 내 주변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꿈에서는 내 옆 자리에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게 이불을 던지고 화를 냈다. 나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영어로 직접 이불을 가져가라고 하다가 잠이 깼다.

왜 갑자기 영어를 썼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른 꿈에서 이제 남이 된 사람도 보았다. 그 사람은 어떤 글을 읽고 있었다.

2시에 깨고 4시에 깨고... 계획대로 어쨌든 5시에 깼다. 


5시에 일어난 이유는 아침을 먹고 노고단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그동안은 노고단에 새벽에 올라갈 수 없었는데, 금년에 일시적으로 일출을 볼 수 있게 개방했다기에 한번 보고 싶었다.

해는 매일매일 어디서든 뜨지만, 게다가 아무 의미없이 보내는 해이지만

특별히 마음을 내어 보는 해는 소중하게 느껴진다. 매일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


사람들도 다들 일찍 일어났다. 오늘 일출시간은 오전 6시 9분이다.

비누는 쓸 수 없다길래 순한 클렌저를 솜에 묻혀 얼굴을 닦은 후에 화장실 세면대에서 찬물로 세수를 했다.

새벽에 찬물로 세수를 하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선 화장실을 나와서 하늘을 봤는데, 어제 밤에 가득하던 구름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까만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아.. 나도 모르게 한참을 별을 봤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물 묻은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새벽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대피소로 들어가 짐을 챙겼다.


아침은 건조블럭 북어국, 참치캔 하나와 콘와플 7개를 먹었다. 

다른 사람들은 햇반도 끓이고 그러던데,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동안 무거운 마음에 밥을 거의 먹지 않았더니 위가 줄었나..? 아무튼 기운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았다.

그런데 쓰레기를 잘 챙긴다면서 정신없이 배낭을 매고 나오다가 어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준 빵과 함께 대피소에 놓고 와버렸다.

빵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지만 안먹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대피소에서 노고단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별을 보며 아무도 없는 노고단 길을 오르는 것은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멀리서 어슴푸레 밝아지는 하늘빛을 보는데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가는 것이 아쉬워 서서는 둘러보고 또 다시 오르고 아무튼 지렁이속도로 올라갔다.

노고단 정상에서 해가 뜨는 걸 보려고 한참 기다렸다. 사실 정확히는 한참인지는 모르겠다.

9월 초이긴 해도 산 위는 정말 추웠다. 소프트쉘 하나 걸치고 가만히 서서 기다리려니, 손이 시려워서 마비가 오는 것 같았다.

그냥 내려가버릴까 말까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오기로 버텼다. 

하늘에 구름이 약간 있어서 사람들이 오늘은 일출보기 힘들겠다고 한마디씩 하는데 해가 구름 위로 머리를 들이밀더니 순식간에 붉게 반짝였다.

손이 아픈 것도 잊고 떠오르는 해를 봤다. 

이래서 사람들이 일출을 보려고 산에도 오르고 넘치는 인파와 함께 바닷가를 찾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해를 매일 아침 보면서 하루를 맞으면 그 사람은 하루를 얼마나 소중하게 보낼 수 있을까.

하긴 매일 떠도 인식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겠지. 요즘의 한심한 내가 그렇듯.

붉은 해도 아름다웠지만,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길이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 가득 했던 순간이어서.


내려오는 길에 물매화를 봤다. 

물매화가 엄청 아름답다고 극찬을 해서 무슨 꽃인가 궁금했는데, 상상과는 다르게 갸냘프고 섬세해 보이는 꽃은 아니었다. 

사실 난 어떤 꽃이 다른 꽃보다 더 아름답다.. 그런 식으로 비교하는 사람은 잘 이해가 안갔는데,

막상 물매화 칭찬을 들었을 때는 반박을 못했다. 하긴 굳이 내 의견을 말한다고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

세상에 아름답지 않고 쓸모 없는 꽃이 있을까?

이유없이 피었다가 지는 꽃은 있을까?

치열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지 않는 꽃은 있을까?


노고단-임걸령까지의 길은 전에도 와봤기에 익숙했다. 

역시나 비밀의 숲길처럼 아늑하고 예뻤다. 특히 이른 아침에 걸으니까 사람도 없고 좋았다.

8월 중순에 왔을 때는 길에 온갖 야생화가 가득해서 화려했는데, 이젠 9월이라고 꽃이 그때처럼 다양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예뻤다.

이번엔 임걸령 샘물도 마셨다. 목이 마르지 않아서인지 아주 맛있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번 마셔봤다.


임걸령지나서부터는 배낭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그래서 핑계김에 아주 천천히 걸었다.

배낭이 없었으면 성큼성큼 걸었을 길이 참 길었다. 

그래도 언제 또 올까 싶어서 노루목에서 반야봉을 들렀다 오기로 했다. 

와.. 그런데 노루목에서 반야봉 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멀리에서는 부드럽게만 보이던 능선이 가까이 가서 보니까 돌 투성이였다.

어깨에 짐이 없었으면 괜찮았을텐데, 한걸음 한걸음이 진심으로 천근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올라갔다. '반야봉'이라고 써있는 돌 옆에 가자마자 바로 털썩 앉아서 오래 쉬었다.

멀리 노고단이 보였다. 

언제 저기까지 가나했는데, 무거워도 한걸음씩 걷다보니 반야봉도 와보는구나.

사는 것도 그냥 이렇게 순탄하기만 하면 좋을텐데...하긴 굳이 따져보면 난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도 예기치 않은 흙구덩이같은 인간관계는 안맺고 싶다.

난 진실하지 않게 사람을 대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진실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서 나는 힘든 적이 많았다.

자신을 숨기는 것이 유연하게 인간관계를 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사람을 만나야되는건지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건지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필요하지만, 대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인걸까.

그 사회에 적응하면 나는 행복해질까?

그 사회인들이 내게 말하듯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반야봉에서 내려왔다.


연하천 사거리까지 오는 길은 더 길게 느껴졌다.

작업을 오래 서서 하다보면 왼쪽 무릎이 아프곤 하는데, 산에서 무릎이 아픈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별로 쓰지도 않았는데, 너무 아팠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통증이 컸다. 짐은 무겁고.. 어떻게 연하천대피소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3시쯤 도착했는데 6시에 입실이랬다.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니!

천하장사 소세지 세 개를 먹으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서 탁자에 엎어져서 졸았다.

춥고 배고프고 졸립고. 다행히 5시에 일찍 입실을 시켜줬다. 


추워서 더운 물을 마시고 싶은데 버너가 없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떤 사람에게 처음으로 더운 물을 얻었다.

노고단에서 연하천까지 오는 길에 몇 번 만난사람같은데 얼굴은 잘 기억이 안났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더운 물 한모금이 목을 타고 배로 흘러들어 가는데 행복했다.

물 한모금이 이렇게도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는 걸 오늘 오랜만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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