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일 목요일

다산의 사상을 읽다보면 이 조선시대에도 이런 깨어있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놀랄 때가 많아서 한번은 꼭 다산초당에 가보고 싶었다. 다산은 강진으로 귀양을 가서 근 18년간 그 곳에서 수많은 글을 썼단다. 대체 어떤 곳이었길래 쉼없이 공부하고 생각하고 가르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가려면 워낙에 오래 차를 타야해서 생각만 하고 있던 와중에 마침 광주에 갈 일이 있어서 일을 마치고 2박 3일을 남도 여행기간으로 잡았다.

광주에서 강진까지는 버스를 타고 한시간 반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침 광주 유스퀘어에서 버스를 타고 강진읍에 내려 미리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내려놓고 나왔다. 비수기인 겨울인데다 평일이라 그런지 숙소전체를 나혼자 썼다. 강진은 생각보다 많이 따뜻했다. 초록빛이 여기저기 가득한 것이 꼭 초봄같은 느낌이었다. 제일 먼저 목적지인 다산초당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농어촌 버스라고 하는데 버스가 셔틀버스처럼 작았다. 차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득해서 앞에 앉았다가 제일 뒷 구석으로 옮겼다. 버스에 탄 사람들이 각자 다른 동네 사람같은데 얼굴이 서로 익은지 서로 얘기를 나누며 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옆에 새 달력을 하나 들은 할아버지가 나보고 볼 게 뭐 있어서 다산초당에 가냐고 물었다. '궁금해서요'

다산수련원에서 내려서 다산초당으로 좀 올라가야 한다. 초반에 그릇굽는 공방같은 건물이 있는데, 이제는 아무도 쓰지않고 비워져있는지 초벌만 구워진 그릇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이런데서 작업을 하면 어떨까. 길이 생각보다 짧았는데, 길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좋았다. 본래 사람들이 많은 걸 좋아하지도 않지만, 광주에서는 이래저래 많이 피곤했었는데, 그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물소리와 새소리가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다. 12월에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면 마음이 언제나 편안해져서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다산 초당에는 건물 세 개가 있는데 정면의 건물은 본관? 그런 용도로 쓴 것 같고 왼쪽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 오른쪽 건물은 자신이 기거하던 곳같았다. 초당이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기와가 올려져 있긴 했지만 단정한 모습만으로도 보기 좋았다. 혼자 마루에 앉아서 한참을 바람소리와 물소리와 새소리를 들었다. 볕이 마루 가득히 들어 따뜻하니 세상에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행복이라는 건 오래가지 않지만, 이렇게 순간순간 행복할 수 있으면 그게 평생 행복한 인생아닌가.


오른쪽 건물을 지나 오솔길을 오르니 백련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다산은 백련사의 스님(혜장)과도 친해서 서로 이 길을 통해 오가며 만나고 했단다. 비록 윗사람에게 미움을 받아 외지로 유배를 당하긴 했지만, 이토록 평화로운 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는 친구와 자신의 생각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가득했다면 다산은 그렇게 불행한 사람은 아니었지 싶었다. 사람마다 외로움을 느끼는 때가 다르겠지만, 나는 언제 외로움을 느낄까 생각해보니, 아무도 내 생각이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끊임없이 친구를 찾아 헤매었으나, 그냥 친구를 만나면 만나는 거고 아니면 혼자 있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겠다는 깨달음을 요즘 얻었다. 

 눈 녹아 비탈길은 미끄럽고
모래 둘러싸여 들집이 움푹하네.
얼굴에서 산중의 즐거움 가득하고,
세월따라 변하는 몸 신경 안쓴다네.
말세 인심 대개가 비루하고 야박한데
지금 이렇게 진실하고 솔직한 자도 있다네.

              혜장이 오다-다산-1807

오솔길 끝에 만난 백련사는 생각외로 황량한 느낌이었다. 절 건물 몇 채가 공사중이어서 그랬을까. 

백련사에서 내려와 큰길에 닿으면 강진읍으로 가는 버스도 있지만 시골이라 버스 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고 걸을만 할 거라는 생각에 백련사에서부터 강진읍까지 걸었다. 내려오는 길의 양 옆에는 꽃망울이 달려있는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있고, 들에는 보리인지 뭔지 초록 풀들이 가득 자라고 있어서 꼭 봄같았다. 강진만 방파제 길에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조금 춥긴했지만 아무도 없는 쭉 뻗은 길을 갯벌과 춤추는 갈대들과 함께 걸으니 행복했다. 가슴이 시원하고 따뜻한 바람으로 가득차게 천천히 걸으며 깊게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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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6일-27일 토,일요일


어떤 모임에서 경상남도 양산에 있는 영축산에 올라간다고 해서 같이 합류하겠냐기에 간다고 했다. 아침에 KTX를 타고 울산에 가서 영축산을 등반한 다음 그 아래의 통도사에서 묵는 계획이다. 영축산은 부산에서 가까운, 그러니까 서울에서는 아주 먼 편에 속하는 곳에 있다. 그래서 가는 시간이 오래걸릴 줄 알았는데 기차를 타니까 두시간 반만에 울산에 도착했다. 빠른 시간에 반비례하여 많이 비싼 교통비는 약간 고민을 하게 했으나, 송광사, 해인사와 더불어 3대 사찰의 하나인 통도사에 방문하는 것도 매력적이고, 영남알프스의 끝자락인 영축산을 미리 답사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영축산에 오르면 신불산의 억새밭이 보인다고도 해서 기대가 많았다.

아침 7시 45분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울산역에 도착하니 감사하게도 픽업을 오신 분들이 있었다. 모임의 한 분이 친한 분 덕이다. 울산의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간만에 서울을 떠나니까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일정이 순간 바뀌어 산에는 올라가지 않고 통도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되었다. 아쉬웠지만 스님 및 여러 명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내게는 쉽지 않은 경험이니까 즐겨보기로 했다. 난생 처음 스님이 묵으시는 곳에서 차를 얻어마셨다. 스님의 방은 단촐하지만 아기자기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한쪽 벽면에는 일반 서적, 불교경전등이 빼곡하고, 반대벽면엔 작은 오디오가 있었다. 스님이 뇌과학에 관심이 있으신 듯 했다. 차는 그냥 녹차였는데, 사람들과 나눠 마시는 분위기가 좋았다.

 

차를 마시고 스님이 통도사 경내를 설명하며 알려주셨다. 절은 많이 컸다. 전에 절 그림을 그릴 때 내소사를 모델로 하고 해인사를 답사를 했었다. 그런데 통도사를 보니까 내가 상상한 절의 모습과 많이 비슷해서 신기했다. 스님이 절을 알려주시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이다. 스님이 새롭게 해석을 해주셨다. 인자무적이라는 말은 본래 맹자에서 나온 말로(하지만 그 전 부터 있었던 말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걸 더 깊게 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즉. '어진 사람이 적이 없다'라고 단순하게 해석하기 보다는 '어진 사람은 적개심敵愾心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진 사람이라면 나와는 다른 것에 대한 인내심의 폭이 아주 넓어서 적개심을 가질 수가 없단다. 적개심을 가지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고 그래서 결국은 적이 없어지게 되는 것. 들으면서 참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우주는 하나지만 인간 각각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우주는 제각각이다. 그러니 내가 내 우주를 만든다고 봐야하는데, 난 참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았다. 세상에 왜 이해할 수 없어 갑갑하고 미운 것들이 있을까.. 요즘 많이 생각해보았는데, 그건 내가 내 자신을 그다지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나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나는 나보다는 남을 의식했고, 그래서 남에게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하고 그랬다.

스님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별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무거운 주제를 꺼내는 건 분위기에 맞지도 않는 것 같아서 그냥 내내 조용히 사람들이 하는 얘기만 들었다. 얼굴은 알아도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낼만 했다. 

통도사는 새벽 3시 30분에 새벽예불을 시작한다고 해서 일찍부터 서둘러서 예불에 들어가봤다. 법당이 너무 커서 내가 이제까지 참석해본 아침 예불들에 비해서 스산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그 새벽부터 난방도 되지 않은 추운 법당에서 신실하게 절을 하고 염불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신기했다. 다들 어떤 기도들을 하고 있을까. 항상 실수를 하고 늦게 깨닫는 나이지만 이렇더라도 꾸준히 깨달으며 어진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추운 법당에 앉아서 했다. 나를 참으로 사랑해주고 싶고 보듬어 안아주는 내가 되었으면, 그런 사랑만 알고, 만들고,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아침에 서울로 떠나기 전에 통도사 근처 암자들을 잠깐 산책했다. 안개가 가득해서인지 자꾸 물방울이 맺혀 눈썹이 젖었다. 어제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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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11일 일요일

민박 

       - 이상국 


울산바위 꼭대기에는 
별들의 집이 있다 

어느날 
집 떠나 
해 지고 어두우면 

그곳에 가 자고 싶다 





그러나, 세석 대피소에서는 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매트가 없어서 담요 한 장만 빌렸는데, 바닥은 딱딱하고 주변은 시끄러웠다. 산악회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토요일 밤이라서 더 그렇겠지.

나는 무릎도 아프고 너무 피곤해서 8시부터 누워버렸고, 10시쯤 숙소의 불을 모두 껐는데, 깊이 잠이 들지를 않았다. 내내 모든 소리를 다 들으며 비몽사몽으로 누워 있었다. 그나마 내가 배정받은 11번 자리는 10번자리가 기둥때문에 비어있어서(머리맡에 기둥이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자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한쪽은 편안했다. 대학 mt 이후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눈을 붙인 것이 처음인 것 같다. 연하천대피소 사람들에 비해서는 모두 조용한 편이었고, 옆사람이 코를 고는 것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코고는 소리가 차라리 연하천 대피소의 불규칙적인 나무삐걱거림 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왠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피곤해서 생각도 하나도 들지 않고, 그냥 머리가 멍했다. 

새벽 2시 30분쯤부터 사람들이 벌써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 천왕봉 일출을 보러 가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천왕봉 일출을 볼 계획이 없었지만 잠도 오지 않고 무릎도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해서 그냥 일어났다. 주섬주섬 배낭을 다시 싸고, 아래 샘의 차가운 물로 세수와 양치를 했다. 새벽엔 약간 쌀쌀했지만, 차가운 물로 얼굴과 눈을 닦아내니 멍한 머리 속까지 깨끗이 씻기는 기분이다. 벌써 머리를 감지 않은지 3일이 넘었으니 머리가 갑갑해질 때도 되었는데, 신기하게 거북하지 않았다. 땀냄새도 그렇고. 나 혼자 있는 산이라면 괜찮아도, 다른 사람을 만날 때 혹시라도 안좋은 냄새를 풍길까봐 너무 걱정했는데,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괜찮았다. 속옷은 매일 갈아입었지만, 겉옷은 냄새가 안나서 신기했다. 새로 물을 뜨고, 어제 사놓은 초코파이를 비상 간식으로 보조가방에 챙기고, 배낭을 메고 장터목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새벽 3시 30분.

난 원래 새벽에 걸을 계획이 전혀 없었다. 손전등이 있었지만, 화장실을 가거나 샘터에 가거나 아니면 불꺼진 숙소에서 물건이나 찾으려는 용도였지 산길을 걸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자전거 헤드라이트를 뽑아들고 왔던 거였다. 배터리 4개가 들어가는 작은 손전등. 원래는 꽤 밝은데, 떠나기 전날 밤 램프를 켜보니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건전지를 사러 나가기도 귀찮고 해서 집에 마침 있던 새 배터리 2개만 갈아끼워서 가져왔다. 그래서인가 불빛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래도 새벽에 세수를 하러 가거나 할 때 길을 비추는 용도로는 충분했다. 

그런데, 산길은 달랐다. 정말로 칠흙같은 어둠. 차라리 별이 있는 하늘이 더 밝게 느껴질 정도로 숲길은 어두웠다. 내 자전거 헤드라이트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게다가 어제 잠깐 내린 비로 길은 많이도 미끄러웠다. 한 5분 걸었는데, 혼자서 더 이상은 무서워서 갈 수가 없었다. 산장의 불빛도 보이지 않으니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난 천왕봉에 뜨는 해를 보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고, 잠도 안오고 해서 걸으려고 나왔던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을 무릅쓰고 갈 정도로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다시 뒤돌아 대피소 쪽으로 걸어가는데 몇 발자국 지나지 않아 앞쪽에 움직이는 불빛이 보였다. 

짧은 순간 생각했다. '어차피 지금 대피소를 가도 잠을 자지는 못할 것이고 할 일도 없는데다가 일찍 출발하면 집에 돌아갈 때 교통 체증없이 버스를 타고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물어보자'

상대의 불빛이 너무 강해서 그 쪽의 얼굴은 보지 못했는데, 불빛은 세 남자였다. 장터목 방향으로 가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꾹 누르고 동행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자기들은 천천히 가는데 괜찮다면 따라와도 된다고 했다. 나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 참...되돌아 생각하면 별 것 아닌데, 그때는 정말 기뻤다. 

그래서 밝은 헤드랜턴을 머리에 착용한 세 사람의 뒤를 따라 촛대봉 쪽으로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혼자 갈 때는 무서운 길이었는데, 사람들과 함께 가니까 큰 위안이 되고 불안감이 사라졌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최대한 없는 듯 폐 안끼치고 가려고 조용히 따라가는데, 세 사람중 제일 뒤에 가던 사람이 나보고 자기 앞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했다. 평소의 나같았으면 사양했을텐데, 거절 안하고 바로 사이에 꼈다. 왜냐면 내 손전등이 워낙 흐릿해서 길이 잘 안보여서였다. 중간에 끼니까 뒷사람의 불빛과 앞사람의 불빛만으로도 걷기에 큰 도움이 됐다. 

뒷사람은 내가 스틱없이 가는 것에 놀라면서 내게 자기 스틱 하나를 줬다. 처음엔 사양했는데, 너무 사양하면 안될 것 같아 받았다. 그런데 이쯤에서부터 뒷사람에게 고마워서 감동받는 일이 있었다. 바위 투성이인 컴컴한 산길을 가면서 자기 스틱 하나 빌려주는 마음도 고마운데, 내가 한 손에 손전등을 들고가는 것을 보고는 손전등을 넣고 가라고 했다. 어차피 자기가 뒤에서 좀 편하게 비춰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별볼일 없는 불빛이어도 손전등이 없으니 내 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다시 꺼내야 하긴 했지만. 한 손엔 스틱, 다른 한 손엔 손전등을 들고가는 생판 모르는 사람의 불편함을 헤아려 준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뒤에서 내가 배낭을 멘 모습을 봤는지, 촛대봉에서 쉴 때 배낭을 제대로 세팅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난 배낭이 몸에 붙는 게 싫어서 항상 좀 헐렁하게 하고 다니는데, 그 사람 말로는 배낭은 허리에 딱 붙게 고정을 해줘야 한단다. 그래서 한참을 허리끈, 어깨끈, 등을 조정해서 몸에 붙게 만들었더니 한결 편했다. 이걸 난생 처음 알게되다니! 알려준 뒷 사람에게 너무 고마웠다. 

세 사람은 내가 직접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한 사람은 가이드인것 같고, 두 사람은 동료인 느낌이었다. 나처럼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고, 천왕봉으로 가고 있는 중. 세 사람의 중간에 껴서 세석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어둠속에서 그들의 불빛에 의지해 걷는데, 이상하게 든든하고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생전 처음 만난데다가 불빛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목소리만 아는 세 사람에게 우연치 않게 받게 된 안전한 기분이 없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순간들이 고맙고, 행복했다. 아마 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언제 행복했을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할 때 행복했고,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될 때 행복했다. 도움을 주는 일은 행복했으나 도움을 받는 일은 참 어려웠다. 물론 나는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필요도 없는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내게 뭔가를 요구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다지 친하지 않거나 신뢰가 쌓이지 않은 관계에서 도움을 받는 건 정말 두렵고 싫은 일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내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 사람도 내게 이유없는 친절을 베풀었었다. 그 사람은 내가 받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했는데...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 주는 것들이 불편했다. 왜 불편했지? 그건 그가 주는 것들이 내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받는 주제에 뭘 골라서 받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선물이나 도움은 작은 것이라도 상대를 사려깊게 관찰하고 그가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진짜 아닐까. 그 사람은 내가 뭐가 필요한 지 제대로 관찰은 못한 것 같다. 아니면 알았지만 주고 싶지는 않았는지도...하긴 나도 제대로 표현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상황이 너무 어지러웠고 복잡했다. 어쨌든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고 말한 것은 받지 못했다. 

지리산에서 마지막 날 예기치 않게, 원한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들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었다. 여러 번 지리산 종주를 했었는 듯한 선두의 가이드는 원래 세석에서 장터목까지의 트래킹 길이 정말 아름다운데 어두울 때 와서 하나도 못 보게 되는 것이 아쉽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다음에 낮에 또 세석까지 올라 가면 그만인 길이다. 새벽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든든하게 걸을 수 있는 지금이 나는 아무래도 제일 행복하고 좋았다.

장터목에 도착할 즈음하여 여명이 터오기 시작했다. 이젠 손전등이 없어도 되는 시간. 취사장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세 사람과 작별을 했다. 내가 성격이 좀더 살가웠으면 느꼈던 만큼 고마움을 표현했을텐데,..말은 잘 못하고 마음만 가득 담아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세 사람이 복받았으면 좋겠다. 장터목에서 천왕봉쪽으로 오르자 해가 벌써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왕봉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거의 암벽타듯이 돌을 잡고 올라가다보니 천왕봉이었다. 

여기가 지리산 천왕봉이구나! 말로만 듣던. 여기에 오려고 3일을 꼬박 아픈 무릎을 끌고 걸어왔다. 살짝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는데, 천왕봉에서 보이는 산들과 구름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흠뻑 땀에 젖은 열오른 머리와 몸을 식쳐주는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커다란 지리산을 봤다.

반야봉아 안녕, 노고단아 안녕, 구름아 안녕, 모두 좋은 아침을 맞았구나.

난 산 아래서 삶이 불완전하게만 느껴져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고 징징대고 있었는데, 여기와서 보니까 왜 그랬다 싶다. 그래서 산이 이렇게 큰가.

남들 다 찍는 인증샷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찍고 엄마, 친구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사진을 보내달라고 해서)에게 보냈다. 사장님은 아무 생각없이 했겠지만, 기어서라도 올라가보라는 말에 오기로 오길 잘했다. 하면.. 정말 된다.

중산리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좀 짧은 칼바위 방향으로 내려왔다. 천왕봉에 올라갔다와서 마음이 풀려서 그런건지, 빗물에 젖은 돌이 미끄러워선지는 알 수 없지만 최대한 천천히 내려왔는데도 여러 번 길에서 넘어졌다. 그래서 산에서 내려와 살펴보니 양쪽 무릎이 바위에 긁혀 다 깨지고 왼쪽 손바닥에도 멍이 들었다. 그래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중산리 내려와서 마지막으로 찬물에 세수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났다. 왜 그랬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슬픈 건 아니었는데.

중산리 버스정류장까지는 무릎도 아프고 해서 택시를 타고 내려왔고, 거기서 원지행 버스를 타고 원지로 왔다. 중간에 버스에서 이상한 남자를 하나봤다. 그 사람은 계속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는데, 그 눈빛이 이상했다.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뭔가 독심술같은걸 하려는 듯한 눈빛? 내릴 때도 계속 나를 쳐다봐서 자는 척 했다. 그 다음부터는 계속 자면서 집에 왔다. 원지 시외버스 정류장에 모아온 쓰레기를 버리고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버스에서는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구례갈 때도 그랬는데, 이번엔 버스에서 자는 잠이 최고로 깊고 편안했다.

블랙홀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떠난 길. 지리산에서 다 풀고 집에 왔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인디언 부족의 성인식이나 그런 것처럼, 지리산을 혼자 종주했다고 해서 내가 인격적으로 성장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가벼워져서 왔다.

모두는 행복해지길 원하고, 그 행복이 항상 같은 방향일 수는 없기에 상처도 주고, 상처도 입히지만 나는 나를 잘 보살피면 될 것이다. 내 무릎이 그래줬듯. 잘 쉬고 나면, 열심히 살고나면 알아서 잘 치료될 것이다.

지리산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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