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1일


나는 '악'자가 들어간 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글자는 그 산이 돌산이라는 것을 의미해서 대부분 아주 험난하기 때문이다.

산행이라는 건 내게 휴식같은 의미라서 돌산에는 안가지만, 원주에 온 김에 이번엔 치악산에 가보기로했다.

지난번엔 갈 생각도 안했는데, 이번엔 머리가 복잡하기도 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숙소에서 7시 40분 차를 타고 원주 시내(남문시장)에 가서 한 30분 기다리는 동안 산행에서 먹을 간식을 샀다.

이온음료 400ml 2개, 물 500ml 1개, 와플과자 5봉지, 견과류 3봉지, 맥스봉3개.

이렇게 쓰고보니 먹을 걸 적게 가져간 것 같다. 그런데 가방도 옆으로 매는 보조가방만 가져가기도 했고, 이미 그 안에는 산행 후 갈아입을 티셔츠가 들어있어서 그것만 넣어도 가방이 꽉 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치악산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게 싸갔지 싶다. 

하지만 난 산행 중에 화장실을 못가기도 하고 배가 불러지는 것이 불편해서, 밥을 싸가지는 않았을 거고 음료수를 한 병 더 가져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 물 말고 이온음료로. 


하루에 5번있다는 23번 버스를 타고 한 50분을 달려 성남리에 도착했다. 전날 숙소에 중고등학생들 단체가 와서 새벽 1시가 되도록 소리지르고 떠드는 바람에 잠을 잘 못자서 버스에서 몇번이나 꾸벅거리며 졸았고, 버스에서 내리니 꿈인지 생시인지 잘 가늠이 안됐다. 

피곤한 탓인지 아니면 아침식사로 잼바른 식빵 두 조각 먹어서 그런건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등반을 시작했다. 그래봤자 산 아니겠어 라는 생각도 있었다.


10시 15분.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찻길을 걸어 성남 탐방지원센터에 갔다. 산에 있는 동안에는 화장실에 가기 힘들테니 깨끗한 화장실에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보고 다시 길을 올라갔다. 등반을 시작하는 시점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차가 있는 사람들은 거기까지 가서 앞에 주차를 해놓고 올라갔다. 

차는 꽤 있었지만 막상 산길에서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지리산도 큰 산이었지만 주 중임에도 종주를 하는 사람이 많았기때문에, 길을 잃거나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치악산은 지리산에 비해 작아도, 이미 험난하다는 얘기를 들은데다가 전혀 가본적이 없어서 혼자 가기가 좀 겁이 났다. 

나는 같이 갈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누구한테 같이 가자고 말을 할 오지랖도 없었다. 그래도 토요일이었고 잘 알려진 산인만큼 사람이 꽤 있을 줄 알아서 강행한건데, 사람이 참 없었다. 조금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조용한 산길이 주는 평화가 마음을 채워주니 나쁘지 않았다.

치악산의 본래 이름이 적악산(岳山)이라고 하니 가을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상원골을 지나 상원사까지 가는 길은 조용하고 평탄했다. 아니 평탄했던 것 같다. 돌아보면

상원사는 정말 산골짜기 안에 있었다. 이렇게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절을 오랜만에 방문한 느낌이었다. 산 깊숙이 가파른 경사지에 위치한 것 치고는 깨끗하게 정돈되고 넓은 느낌이 드는 좋은 절이었다. 아주 순해보이는 개 두 마리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소세지를 꺼내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내 식량이 모자라져서 그냥 쓰다듬어 주고 말았다. 12시가 다 된 시간이라 공양간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개들은 소세지보다 맛있는 걸 먹을 수 있겠지. 대웅전에서는 어떤 사람의 49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상원사를 방문한 날. 누군가의 영혼은 환생을 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상원사를 떠나 남대봉으로 향하는 길에 깨끗한 화장실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게 구룡사까지 가는 길에 마지막 화장실이었다.

남대봉을 지나 향로봉까지 능선을 따라 걸어서인지 올라갔다 내려갔다는 했어도, 쌓인 낙엽이 쿠션이 되어 푹신하고 좋았다. 한창 온갖 야생화가 피어서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둥근이질풀, 동자꽃, 꼬리풀들이 특히 많이 보였다. 다른 꽃들도 많긴 했는데, 이름을 잘 몰라서 아쉬웠다. 그런데 굳이 알고 싶은 마음이 지금은 생기지 않는다. 꽃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꽃을 내가 다 아는 것 마냥 잘난척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서다. 모르면 그 나름대로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지금보다 훨씬 현명해져서, 꽃들의 이름을 알아도 그것들이 피어났을 때까지의 힘겨움과 그것의 아름다움을 언제나 소중하게 생각하게 될 수 있다면, 

그때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4시경. 향로봉에 도착하니 어떤 사람이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다가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구름이 너무 아름답게 하늘에 떠있어서 그 사람은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했는데, 노출을 구름에 맞추면 얼굴이 검어지고, 얼굴에 노출을 맞추면 구름이 하얗게 날아가버렸다. 스마트폰카메라가 그렇지... 그래서 노출을 다르게 해서 두 장씩 찍어줬다. 그 사람은 내게 사진을 찍어준다고 했는데, 난 이미 온몸과 머리가 땀 범벅이 된데다가, 배터리도 아껴야 될 것 같아서 안찍는다고 했다. '그래도 인증샷은 있어야죠'라고 그 사람이 말했다. 근데 무엇을 위한 인증일까. 인증 안하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기억이 남는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왜곡되지만, 그 나름의 멋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대부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미화시키게 되니까말이다. 물론 사진을 남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사진을 보며 얻게되는 즐거움도 있다. 그런데 오늘 산행은 마음도 무거워서 그다지 사진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차라리 미화된 기억일테니까. 안전산행을 기원하며 그 사람과 떨어져 다시 길을 걸었다.

향로봉이면 지도 상으로는 반 정도 온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계획한 것보다 자꾸 시간이 지체된 것 같아 여기서부터 마음이 조금 급해지기 시작했다. 길도 비슷하게 편하기도 해서 황골 삼거리까지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주변 풍광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몸이 피곤해지면 난 왼쪽 무릎에 통증이 오는데 서서히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끔씩 만나는 계단에서 내려갈 때마다 아파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황골 삼거리에 도착하면 황골탐방센터로 내려갈까? 하고 수십번도 더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걸으면 비로봉인데, 그냥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면 괜찮으니까 내리막 길에서는 아주 천천히 가고 평지에서는 조금 속도를 내어 걷는 식으로 황골 삼거리를 지나 비로 삼거리에 도착했다. 

비로 삼거리에서는 비로봉이 보였다. 그 위에 두 개의 돌탑이 보이고, 돌탑으로 향하는 끝이 없어보이는 계단도 보였다. 

비로삼거리에 도착했을 무렵엔 체력이 거의 소진한 상태였다. 잘 먹지도 않았던 데다가 사실 돌아보니 이렇게 오랜 시간을 산행한 것도 내 인생의 처음이었다. 

지리산 종주할때는 3박 4일에 걸쳐 천천히 갔기 때문에, 이 정도로 체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는데, 5시간 넘게 땀을 흠뻑 흘리며 나름 속도를 내어 걷다보니   힘이 많이 들었다. 식수도 이제 200ml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더라도 산에서는 해가 빨리 떨어질테고 그래서 5시까지는 내려가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비로 삼거리에 앉아서 비로봉을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비로봉에는 올라가지 않기로 했다.

비로봉에서 내려가는 하산길은 사다리병창과 계곡길 두 개가 있는데, 지금 내 다리 상태로는 비로봉정상에서 사다리 병창으로 바로 내려가는 것도 무리였고, 그렇다고 계곡길로 내려가려면 어쨌든 비로봉에 올라갔다가 비로 삼거리로 다시 내려와야 하는데, 계단을 내려올 엄두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봉우리에 오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치악산을 걷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굳이 비로봉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리를 털고 일어나 계곡길로 내려왔다.


진심으로 내가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내려오는 길은 끝없는 돌길이었다. 게다가 지리산의 하산길과는 다르게 돌들이 뾰족하고 경사는 엄청나게 가팔랐다. 

무릎이 너무 아팠다. 그나마 다리를 굽혀서 거의 바위에 붙듯이 내려오면 통증이 덜해서 최대한 몸을 굽히고 돌에 붙어서 내려왔다. 이제는 양쪽 무릎이 다 아팠다. 무릎의 고통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온갖 잡생각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갑자기 마구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무 힘드니까 울음이 나오지 않고 신음소리만 나왔다. 나와 함께 돌을 따라 내려가는 물이 얄밉게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다. 왠만해선 졸졸 흐르는 물소리도 들어가며 내려갈텐데, 무슨 정신으로 세렴폭포까지 내려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계곡은 깊어 해가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시간은 5시가 다 되어가고, 물은 다 마신지 오래였다. 목이 마르고 피곤하고 다리는 참을 수 없이 아팠다. 나의 지금 삶처럼 너무나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산은 내려가야 했다. 아니면 곧 해가 질지도 모르니까. 


그러다 어느순간 앞이 밝아지면서 길이 편해졌다. 산을 다 내려온 것이었다. 세렴폭포였다. 여기에 와서야 폭포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도착하면 막 펑펑 울 것 같았는데, 몸에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목이 너무 말랐다. 시원한 생수병을 들고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사람이 아니고 물병만 보였다. 분명 세렴폭포에서 구룡사까지의 길은 사람의 손이 단장하여 평탄하고 좋은 길인데 다리는 아프고 몸이 너무 무거웠다. 구룡사앞에 카페 겸 매점이 있길래 생수 한 통을 사서 그 자리에서 다 비우고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었다. 마른 모래에 물 주듯 몸이 그제서야 조금 가벼워졌다.

구룡사 버스정류장에 내려와서 앞에 있는 화장실에서 땀에 젖은 티셔츠를 갈아입었다. 

그런데 속옷이 젖어서인지 아니면 보조가방이 젖어서인지 계속 땀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내 땀냄새를 맡으며 6시 15분 버스를 50분정도 타고 원주 시내로 왔다. 


버스 안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비로봉까지는 올라가지 않았어도, 힘들다는 치악산을 살면서 처음으로 7시간을 산행을 하면서 종주를 했다. 그러면 작은 목적 하나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으니까 성취감이라는 것도 생겨야 하는데, 그런게 없고 왜 이리 삶은 힘든 것일까 하고 자꾸 우울해졌다.

물론 그 힘듦도 끝은 있다. 하지만 끝이라고 믿고 싶은 끝이 진실로 끝은 아니라는 걸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삶에는 고난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망각이라는 기본 장착된 요술로 끝이라고 믿게 되는 것일 뿐. 망각을 해야 앞으로 나갈 수가 있으니까 잊고, 긍정적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는 이상 어찌 고난이 끝날 수 있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혼자서 산에 올 수 있을 만큼 지능도 있고, 두발로 혼자 산을 넘어올 만큼 체력도 있다. 이젠 너무 오래걸으면 다리가 아프긴 하지만,(이번엔 병원에 꼭 가봐야겠다) 어쨌든 나는 산을 남의 도움 없이 갔다 왔다. 그런데 끝도없이 외로웠다. 내가 너무 잘난척을 하며 살아온걸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까다롭고 예민하게 살아온걸까.


거절을 당하지 않으며 살고싶었다. 거절을 당하는 것은 내게 너무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한 자식, 착한 학생, 조용한 자식, 조용하고 차분한 학생으로 그렇게 살아왔다.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 이유도 어쩌면 그게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인생은, 적어도 지난 10년간은 거절의 연속이었다. 

거기다 최근 몇 달간 인간과 일에게 거절을 당하니까 마음에 너무 상처가 됐다. 상처가 깊으니까 내가 미워지고 그래서 어디론가 계속 숨고 싶어졌다.

그런 와중에 오게된 원주는 좋았다. 얼마만인지도 기억 안나게 오랜만에 푹 잤다.


그렇지만 어이없게도 치악산에서.. 마음을 비우려고 온 이 치악산에서 머리가 더 복잡해져버렸다.

악하게 살고 싶지 않고, 악에 받혀서도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악'자가 들어가는 산이 싫었던 걸까.

분명 치악산에 가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경험과 깨달음은 있고, 계곡길을 내려오고나니 왠만한 산은 이제 다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그런 힘을 내게 치악산은 주었다.


하지만 다음엔 넓고 순한 흙산에 가야겠다. 그리고 괴로운 마음이 새가 되게 아무도 없는 그 산에서 펑펑 울고 싶다.

그러면 몸보다 커진 날개를 펴고 산 위를 '휘'하고 맴돌며 날아야지.

그렇게 변해서 누구와도 고통을 주고받지않고, 뾰족한 돌 사이를 부드럽게 흐르는 물처럼 살고 싶다.

아직 삶을 더 알라고, 부족함을 채우라고 이런 고통들이 내게 온다면 할 말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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